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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나는 리뷰어 진청색 말
#PGC7

<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I must not fear. Fear is the mind-killer. Fear is the little-death that brings total obliteration. I will face my fear. I will permit it to pass over me and through me. And when it has gone past I will turn the inner eye to see its path. Where the fear has gone there will be nothing. Only I will remain.”


이야기가 메마르고, 질문이 없어진 자리에서 묻다

온몸이 마비된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의 육체가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 있다. 런웨이 무대처럼 길게 뻗은 테이블 맞은편엔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전리품을 감상하듯 적수의 패배를 음미 중이다. 축 늘어진 빨래마냥 의자에 간신히 걸쳐 있음에도 레토 공작의 몸은 잘 빚은 조각품처럼 탄탄한 생기를 잃지 않는다. 이윽고 하코넨 남작이 풍선처럼 괴이한 몸을 띄운 채 허공을 미끄러져 다가오자 레토는 마치 황소를 잡는 투우사처럼 이빨 사이 감춰두었던 독안개를 뿜는다. 넓고 황량하고 검은 방은 순식간에 독 안개에 뒤덮이고 어느새 현장을 벗어난 카메라는 바깥에서 문이 닫히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리듯. 하나의 세계가 종언을 고하듯. 눈꺼풀이 감기듯. 황망한 기습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레토가 하코넨과 대치하고 마침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이 시퀀스는 한폭의 그림 같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중세시대 제단화의 한폭을 그대로 뜯어 스크린이라는 캔버스에 옮겨놓은, 움직이는 회화다. <듄>의 성취와 한계, 본색은 이 웅장하고 신비로운 한폭의 그림 안에 모두 담겨 있다. 하코넨은 왜 레토 공작을 발가벗겨놓았을까. 자신의 사냥감을 조롱하기 위한 승자의 변태적 행위인가. 혹시 모를 암습을 대비한 조심스러움인가. 그럴 수 있다. 사실 딱히 설명이 필요한 디테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화폭을 목격하는 순간 뇌리에 스치는 건 중세의 회화가 눈앞에 놓인 것 같은 기시감이다. 나체로 의자에 묶인 레토의 육체는 곤혹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답다. 비장미, 흑백으로 잠식된 세계에서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이 빛나는 살색의 생명력. 뭐라 부르건 상관없다. <듄>은 우아하고 때때로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로 빛나는 영화이고, 레토의 육체는 그 자리에 필요하다.


기꺼이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기로 한 창조자

드니 빌뇌브의 <듄>에 대한 경탄은 대부분 비주얼의 완성도와 방향을 향한다. 황홀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로 거대한 무드를 자아내고 장면의 톤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완성도를 논한다면 원작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을 광경을 그보다 더 생생하게 구현하는 장면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스토리가 이해되기 이전에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시신경에 꽂힌다고 해도 좋겠다. 방향에 대해서는 드니 빌뇌브 특유의 뺄셈의 공식이 적용된다. 그의 회화는 언제나 디테일을 비워내고 여백을 만들어내는 쪽이었다. 사실 그는 화면을 비운 적이 없다. 흔히 여백이라고 불리는 공간감을 가득 채우는 쪽에 가깝다. <듄>의 스크린에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이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군중이 몰려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과는 또 다른 종류의 스펙터클이 들어찬다.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는 상황에 따라 희고 검고 푸르고 누런 하나의 색으로 메워지고 그 위에 점처럼 왜소한 인간을 가져다놓는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사이즈의 쾌감. 여기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사이즈보다는 속도와 호흡에 힘을 주는 것이다. 그저 크기를 키운다고 웅장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장면에 무게를 더하는 작업이다. 무게는 곧 속도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중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드니 빌뇌브의 컷은 흔히 말하는 롱테이크라 할 만큼 길진 않지만 캔버스의 액자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충분히 오래 응시한다. 거의 서막에 불과한 <듄>의 서사에 150분에 달하는 시간이 투입된 건 매컷 충분하게 장면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네마틱’한 순간은 감독의 회화적인 시선이 충분한 시간으로 조리되었을 때 피어난다. 그리하여 예정된 메시아로서의 폴(티모시 샬라메)의 여정은 그의 능력 중 하나인 미래에 대한 단편적인 비전과 함께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키워드는 두 가지다. 감각. 그리고 제시. <듄>의 장면들은 유기적인 연쇄의 결과를 통해 스토리를 자아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 매 장면 이야기보다 무드와 뉘앙스가 먼저 도착하여 관객이 설득되기도 전에 동조시키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는 애초에 방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창조자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텍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드니 빌뇌브는 세계관이 어쩌고, 세계의 진실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창조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는 시큰둥했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그곳의 일부를 잘라서 포착할 뿐이다. 그것이 드니 빌뇌브의 탁월한 지점이었다. 가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관객의 머릿속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저 재현하여 보여주거나. 물론 드니 빌뇌브는 후자다. 대개 가상의 세계관을 제시할 땐 디테일을 꽉 채워 사실과 비슷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리얼리티를 끌어올려 설득하는 방식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공룡의 정보, 이를테면 피부의 질감, 무게감, 웅장한 소리 등 실재하는 정보를 사실적으로 끌어모은 것을 연상하면 쉽다. 드니 빌뇌브는 반대로 움직인다. 이게 말이 된다고 설명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가상) 세계의 일부에 카메라를 떨어트린 것처럼 그저 포착한다. 현실을 닮으려 애쓰는 대신 (카메라를 바가지 삼아 퍼)담는 영화. 과시하지 않고 제시하는 영화. 상상력으로 창조된 세계에 대한 리얼리즘적 접근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름답고 황량한 사막, 이어질 여정을 기다리며

사실 이걸 문제라고 불러야 할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까지만 해도 나는 ‘영화라는 물질’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와 욕망에 경탄과 찬사를 바치는 쪽이었다. 하지만 <듄>을 마주하며 내 안의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듄>을 향한 아쉬운 목소리들은 대체로 빈약하고 불친절한 서사를 지적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어떻게 몰락하고, 폴이 어떻게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며, 메시아로 거듭날 준비를 마치는 것까지가 이야기의 전부다. 익숙한 영웅 서사에 빗대어 보아도 서막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 그럼에도 <듄>이 서사적으로 빈약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에 부족한 건 사건의 총량이 아니라 이야기의 총량이다. 사실 <듄>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중에서도 드물게 친절한 편이다. 어쩌면 너무 친절한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각 인물들의 상태를 충분히 따라가고, 아라키스 행성의 상황도 충분히 관객 속에 스며들 때까지 기다린다. 다만 그렇게 완벽한 장면들을 뭉치고 뭉쳐 완성된 이야기의 덩어리는 우리가 목격한 것들의 웅장함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왜소하다. <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드니 빌뇌브는 폴의 여정, 첫걸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적어도 프랭크 허버트의 <듄>에서 폴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메시아, 광신자, 학살자를 넘나든다. 이것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의 <듄>은 ‘(예견된) 메시아가 온다’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멋지다는 것? 프레멘들의 존재감이 신비롭다는 것? 용감무쌍한 던컨(제이슨 모모아)의 활약상을 더 보고 싶다는 것? <듄>의 이미지와 장면들이 너무나 많은 감흥을 남기는 데 반해 이야기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메시지를 위한 도구는 아니다. 나도 안다.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문구는 영화예술의 방패막이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다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메시지가 아니라 질문이다. 표면적으로 인간인가 안드로이드인가를 놓고 따지는 것처럼 보였던 <블레이드 러너>는 그 끝에서 누가 더 인간다운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조차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 대한 탐문은 이어졌다. <듄>은 어떤가. 이야기가 메말라버린 자리에 어떤 질문과 가치가 남겨지는가. <듄>이 끝난 뒤 불 켜진 극장은 아라키스 사막처럼 황량하다. 황량하지만 그 사막은 분명 아름답기도 하다. 2부에서 이어질 여정이 확신에 찬 메시아의 행보가 될지 아니면 미완의 방랑에 그칠지 알 수 없다.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미 원작의 예정된 길을 미세하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이상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나는 그저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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