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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네필 하얀 라쿤
#Q2P0

<파묘>를 감상한 후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졌다. 영화를 평가하고 설명하는 데 어떤 기준을 삼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오컬트 장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겠지만, 캐릭터들의 개성이 더 돋보인다. <검은 사제들>에서처럼 두 사제의 앙상블이 <파묘>에서도 돋보이지만, 둘 사이의 차이가 명확하다. 결혼식에서 촬영된 단체 사진에서 캐릭터들은 서로 떨어진 위치에 있지만, 묘한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본질을 나타낸다.


화림, 봉길, 상덕, 영근 등 4명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은 전사에 의해 이미 친해진 사이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하지만, 서로를 신뢰한다. 고전적인 이름을 가졌지만 현대적인 성격을 보인다. 이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돈을 중요시하지만 측은지심이 없다.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는 않는다. 이는 사건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1. 당사자의 약화

장재현 감독의 <파묘>에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당사자의 약화다.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주요 인물들은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고 외부에서 관찰하는 입장이다. 사건과 관련된 개인적인 사정은 거의 다뤄지지 않으며, 이는 전통적인 오컬트 장르와의 차별점을 드러낸다. 악귀 역시 인간 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핏줄을 따라가거나 괴롭힌다. 영화는 감정적인 몰입을 거의 주지 않으며, 의뢰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친일파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이러한 약화된 상황에서도 악귀는 손자를 노리는데, 이는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목소리와 언어를 바꿀 수 있는 악귀는 번역자나 매개자 없이도 이해가 가능하다.


2. 몸의 위기와 대면의 비현실

혼령은 인간의 몸을 건너뛰고 원하는 곳으로 직진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은 거울이나 창문 등을 매개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는 혼령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위한 것이다. 대면이 가능한 혼령은 인간이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정령의 존재는 이중적이다. 일부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정령은 물리적으로 현실과 교감하며 인간을 위협한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매개되는 것은 장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영화 <파묘>는 정령을 그리는 방식에서 특히 주목된다. 무사 정령은 노릇을 벗어난 거대함으로 대상을 압도하며 인간을 공격한다. 이러한 표현은 실제의 중량감을 지닌 존재로서의 정령을 구현한다. 그러나 <파묘>의 정령은 다른 작품과 달리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리더도 아니며 인간 몸을 노리는 악령도 아니다. 대신, 그들은 오직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인간의 몸은 영화 내부뿐만 아니라 오컬트 장르에서도 위기에 처해 있다. 매개로서의 역할은 약화되고, 실제의 몸 대신 이미지가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묘>의 무속인은 눈에 띄게 등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무당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도회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며, 패션과 예술을 결합한다. 몸을 지키는 것은 강인한 내면이 아니라 취약한 피부나 일시적인 문신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는 몸의 존재와 위기에 대해 탐구한다.


3.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컬트?

<파묘>는 고통받는 기괴하고 일그러진 당사자의 오컬트가 아닌, 바깥에 선 자들의 오컬트다. 이들은 어떤 일에 연루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외인부대, 혹은 특정 사건의 해결을 위해 뭉친 히어로에 가깝다. 각각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화림은 영적인 것과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고, 봉길은 그를 돕는 역할을 한다. 상덕은 풍수지리에 능통하며, 영근은 상례에 능통하다. 이들은 모두 죽음과 소통하는 능력자들로, '겁나 험한 것'과 싸우고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영화는 오컬트의 외피를 쓴 히어로 영화임을 보증한다. 이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컬트를 상상하게 한다. 전통, 과거, 역사, 무속, 죽음, 장르는 세상이 변해도 그대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맹렬하게 파헤쳐지고 뒤집어진다.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는 역사 놀이판과도 같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실제 역사와 비교한 어떠한 비판도 피해갈 수 있으며, 영화 속에 숨겨진 코드들을 읽어내도록 유도하지만, 과잉 해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주인공들은 한국 시공간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놀이 방식에 적합한 태도를 보여준다. 허깨비를 물리치기 위해 기꺼이 허깨비가 되는 어벤저스는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는다. 마지막 사진 속에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찍혔을지 궁금하지만, 영화는 촬영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원본 링크: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104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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