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정치가 없다. 그래서 정치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명화(박보영)는 "여기 살아도 돼요?"라고 묻는다. 이 공간에서 거주해도 되냐,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어도 괜찮냐는 이중의 의미를 실은 질문에 누군가 답한다. "살아 있으면 그냥 사는 거지. 뭘 물어." 명화는 사는 데 필요한 건 자격과 조건이 아니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흰 쌀밥을 꼭 움켜쥔다. 종교화처럼 쉽고 간명한 상징과 우화의 이미지, 중세 암흑시대 교회 프레스코화에 가까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정정해야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다. 이어 그 실패의 자리에 어떤 호소보다 강력한 동일시가 이뤄진다. 다름 아닌 영탁(이병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굴리는 시뮬레이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다만 이 영화 속 낙원의 기본값은 한국 사회의 아파트에 맞춰져 있다. 오늘의 주거가 아니라 미래의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아파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역사의 태엽을 거꾸로 감아 발전 과정을 뒤섞으며 비틀리고 위장되어 마침내 실패할 모든 낙원들을 경유한다.
첫 번째 낙원은 계급사회로, 한정된 자본이라는 환경하에 주민과 외부인이란 계급 구분을 통해 아파트 주민들의 안전을 도모한다. 두 번째 낙원은 사냥을 중심으로 한 원시공산제다. 아파트 자치회는 생존을 목표로 방범, 의료, 정비, 배급이라는 기능으로 위장한 전근대적 조직을 구축한다. 명화가 도달한 마지막 낙원은 수직의 아파트가 무너지고 수평의 시점에서 구축된 사회로, 하얀 쌀밥은 농경사회의 표상으로 상징성을 지닌다.
정치가 자리를 비우면 사연이 변명이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 폐쇄된 커뮤니티에서 인간의 본성을 응시하는 영화다. 인간과 사회, 두 욕망을 양립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본래의 목적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데 장대하게 실패한다.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그 덕분에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을 투명하게 비추는 데 성공한다.
영화가 지지하는 인물은 명백하게 명화쪽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화보다 영탁에 감정을 투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더 가깝고 편안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설득에 장렬히 실패한다. 정치를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정치란 방향이다. 대화와 타협, 조정을 통해 특정한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행위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역사의 흐름과 정치의 자리에 개인의 사연을 꽉꽉 채워넣었다. 그리하여 의도치 않은 하나의 정치적 위치를 점하는데, 다름 아닌 관찰, 아니 방관의 자리다.
남은 건 감정적으로 가장 가깝고 닮은 쪽으로 작동하는 인력이다. 즉 우리가 영탁의 드라마에 끌리고 동감한다면 그게 바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란 증거다. 영탁은 그저 욕망의 찌꺼기다. 사기를 당하고 가족을 잃었을 때 영탁은 이미 죽었다. 남은 건 행복한 우리 집이 될 거라고 믿었던 아파트를 향한 욕망뿐이다. 함께 사는 집으로서 수단을 상실한 아파트는 재난 이후 살아남기 위한 집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영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파트를 지켜야 한다. 그 절박한 광기는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아파트라는 자산에 목매는 한국 사회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내 집값, 내 자산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정치를 지운 공동체에 유토피아는 없다. 사회의 근간이 무너져 내리는 걸 목격하면서도 우리는 영탁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알기에 차마 그를 부정할 수 없다. 비틀린 광기의 씨앗이 파국의 꽃을 피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사회는 '영탁'이라는 미몽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원본 링크: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103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