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사가 독창적이고 기발할 건 없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역시 지구–1610의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가 어떻게 탄생했고 공식 설정이 어떻게 붕괴될 위기에 처했는지 비밀을 밝히는 흐름을 따라간다. 공식 설정 사건 속에서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되어선 안되는 소년이었다. 그는 차원이동기로 인해 마일스의 지구로 넘어온 지구–42의 방사능 거미에 물려 얻어서는 안되는 능력을 얻게 됐다. 때문에 지구–42에는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 않고, 마일스가 다른 스파이더버스에 개입한다는 건 세계의 붕괴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심지어 모든 스파이더맨들은 반드시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서장의 죽음이다. 지구–1610에서 서장은 마일스의 아버지이고 마일스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미겔 오하라(스파이더맨 2099)의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다. 마일스의 선택은 얼핏 <플래시>의 배리 앨런처럼 사적이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 명의 목숨과 세계의 운명을 저울질했을 때 언제나 대의를 따르는 것, 요컨대 자기희생은 히어로의 조건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거미에 물려서 생긴 슈퍼파워 덕분이 아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 이타적이고 선한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상실과 아픔이라는 경험은 이러한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운명이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설정한 공식 설정 사건이 무엇인지 모두 설명되진 않지만 아마도 이와 관련된 사건들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자기희생이라는 선택이야말로 영웅을 영웅으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믿어왔다). 그렇다면 마일스의 선택은 히어로의 자격이 없는 이기적인 행동인가. 당연히 아직은 알 수 없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마일스와 그웬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정해진 운명, 공식 설정 사건과 완전히 정해진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지다. 이건 강요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A와 B,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으니 선택하라는 건 운명을 빙자한 빌런(마치 조커처럼)이 짜놓은 판에 불과하다. 선택에 의해 바뀔 결과를 판단하는 건 신(운명)의 일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혹은 히어로)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강요하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지는 주어진 선택지 바깥에서 드러난다. 마일스는 공식 설정 사건을 두려워하기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선택했고, 그웬은 마일스를 구하는 걸 선택했다(물론 공식 설정 사건이 바뀔 수 있다는 또 다른 진실을 확인한 뒤이긴 하지만). 그들 각자의 선택이 곧 자신, 자신이 있을 자리,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증명한다.
그리하여 모범답안 같은 서사를 배경으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는 명제를 다른 각도에서 수행한다. 이 작품의 진가는 스토리가 이미 결정된 정답이라는 안정된 길을 가는 사이,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는 표현과 다채로운 형식에 있다. 움직이는 코믹스, 영상으로 보는 만화책이라고 해도 좋을, 경계를 가로지르는 표현력을 보고 있노라면 멀티버스라는 설정이 이토록 현란하고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묘사를 과시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때때로 그 표현양식이 과해 추상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인데, 거의 현대미술 아니 코믹스 미술이라 불러 마땅한 추상적인 표현들이 그 어떤 구상보다 맑고 선명하게 세계의 의지를 전달한다. 그 의지에 내 멋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다르게 볼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추락하는 마일스를 잡는 카메라 앵글에 따라 마일스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바로 그 카메라의 앵글을 관객의 손에 넘겨주려 애쓰는 영화다. 멀티버스가 이야기의 무대만 확장하려 몰두하는 사이 이 작품은 발상을 뒤집어 세계의 표현을 확장했다. 붕괴 중인 멀티버스(서사)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야기가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는 혹은 늘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원본 링크: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103003